태국 이싼지방은 왜 탁신을 지지했는가

태국 정치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자주 등장하는 지역이 있다. 바로 이싼(Isan) 이다. 태국 북동부에 위치한 이 지역은 단순히 넓은 지방이 아니라, 오랫동안 태국 선거정치의 향방을 좌우해 온 핵심 공간이었다. 특히 탁신 친나왓과 그 계열 정당이 가장 강한 지지를 받아온 지역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2019년 총선에서도 프어타이의 핵심 기반은 여전히 북부와 북동부였고, 연구자들은 이 지역을 전통적인 레드셔츠의 심장부로 설명한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왜 하필 이싼이었을까?

왜 태국의 수많은 지역 중에서도 이싼은 유독 탁신에게 강한 지지를 보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단순히 “가난한 농촌 지역이라 포퓰리즘에 반응했다”라고 정리해버리면, 이싼 사람들의 정치적 선택을 너무 얕고 오만하게 해석하는 셈이 된다. 실제로 이싼의 탁신 지지는 돈 몇 푼의 문제가 아니라, 소외의 기억, 삶에 닿는 정책, 정치적 존중, 그리고 선거의 의미를 지키려는 감정이 겹쳐진 결과에 더 가깝다. 

이싼은 오랫동안 ‘주변부’였다

이싼은 태국 안에서도 특수한 지역이다. 문화적으로는 라오계 전통의 흔적이 강하고, 언어도 중앙태국어와는 결이 다르다. 하지만 정치와 경제의 중심은 언제나 방콕과 중부였다. 이 구조 속에서 이싼은 오랫동안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 다시 말해 개발과 권력의 혜택이 상대적으로 늦게 닿는 주변부로 인식되어 왔다. 이싼 관련 조사와 연구는 주민들이 지역의 생활수준 향상에 정부 정책의 도움이 있었다고 보면서도, 더 나은 교육과 지속가능한 산업 기반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느낀다고 전한다. 

이 말은 단순히 “가난하다”는 뜻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많은 이싼 사람들이 오랫동안 국가가 자신들을 충분히 존중하지 않는다는 감각을 품고 있었다는 점이다. 중앙의 시선에서 이싼은 종종 낙후된 농촌, 값싼 노동력 공급지, 혹은 선거 때만 주목받는 지역처럼 다뤄졌다. 경제적 거리만이 아니라 심리적 거리도 컸던 셈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탁신은 이전 정치인들과 다른 방식으로 등장했다.

탁신은 처음으로 이싼을 ‘핵심 유권자’로 대했다

탁신이 이싼에서 강했던 이유를 설명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정책이다. 실제로 그건 맞다. 탁신 정부의 대표 정책인 30바트 의료제도, 즉 2001년 이후 전면화된 태국의 보편적 건강보장 제도는 의료 접근성을 높이고, 의료비 때문에 가계가 큰 타격을 입는 문제를 줄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러 연구는 이 제도가 특히 저소득층과 취약계층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고, 태국의 재난적 의료비 지출과 의료로 인한 빈곤화를 줄이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이 정책이 왜 이싼에서 특히 강하게 기억되었는지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농촌과 저소득층에게 병원비는 단순한 비용이 아니라, 삶 전체를 흔드는 위험이었다. 아프더라도 참아야 하고, 병원에 가더라도 비용을 먼저 걱정해야 했다. 그런데 국가가 “적은 부담으로 진료를 받을 수 있다”는 구조를 만들자, 그것은 단순한 복지 확대가 아니라 삶의 불안을 실질적으로 줄여주는 변화로 다가왔다. 이싼 사람들에게 탁신은 공약을 말한 정치인이 아니라, 병원 문턱을 낮춘 정치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1백만 바트 마을기금(Village Fund) 같은 정책도 더해졌다. 이 정책은 거대한 산업개혁이나 구조 전환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농촌 마을 단위에서 자금 접근성을 높이고, 생활의 급한 불을 끌 수 있게 해줬다. 아시아재단의 이싼 보고서는 주민들이 보편적 의료보장과 마을기금 제도를 강하게 지지했다고 전한다. 그것이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생활 향상에 도움이 되었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즉, 탁신은 이싼에서 단순히 “좋은 말을 한 정치인”이 아니라, 실제로 피부에 닿는 변화를 만든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이싼의 지지는 ‘돈’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탁신과 이싼의 관계를 정책 효과만으로 설명하면 여전히 부족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탁신이 이싼 사람들을 정치의 주변부가 아니라 중심부로 대했다는 점이다.

탁신 이전에도 태국 정치인들은 지방을 찾았고, 농촌 표를 의식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지방은 선거 때 동원되는 숫자에 가까웠다. 반면 탁신은 북부와 이싼의 유권자를 전국 정치 승리의 핵심축으로 삼았다. 그는 농촌 표를 “보너스”가 아니라 “본체”처럼 다뤘고, 그 결과 이싼 사람들은 처음으로 우리 표가 나라를 움직일 수 있다는 감각을 경험하게 됐다. 브리태니커도 탁신이 농촌 전역에서 폭넓은 지지를 확보하려 했고, 이후 그의 지지자들이 주로 북부와 북동부를 기반으로 대중운동을 형성했다고 설명한다.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하다.

사람은 단지 지원금을 받는다고 해서 오래 지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정치적으로 존중받고 있다고 느낄 때 더 강하게 결집한다. 이싼에서의 탁신 지지는 바로 그 지점에서 힘을 가졌다. “우리도 중요하다”, “우리 삶도 국가의 대상이다”, “우리 표도 의미가 있다”는 감각은 단순한 경제적 이득보다 훨씬 오래 남는다. 그래서 이싼의 탁신 지지는 흔히 바깥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감정적, 상징적 기반을 갖게 되었다. 

쿠데타는 오히려 탁신의 기억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탁신이 계속 지지를 받은 이유는 그의 집권기 성과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쫓겨난 이후의 태국 정치가 이싼의 감정을 더 강하게 자극했다.

2006년 쿠데타 이후 태국에서는 선거, 정당, 사법기관, 군부, 왕실과 연결된 기성질서가 복잡하게 충돌했다. 이런 과정 속에서 탁신 지지자들은 “우리가 투표로 선택한 세력이 계속 뒤집힌다”는 감정을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브리태니커는 레드셔츠를 주로 북부와 북동부 농촌 기반의 친탁신 대중운동으로 설명하고, 2009~2010년의 시위 역시 그런 정치적 분노의 연장선에 있었다고 정리한다. 로이터도 2010년 대규모 레드셔츠 시위를 선거를 요구하는 친탁신 세력의 움직임으로 보도했다. 

이때부터 탁신은 단순한 정치인을 넘어 억눌린 다수의 표를 상징하는 인물처럼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가 완벽한 민주주의자였다는 뜻은 아니다. 부패 의혹도 있었고, 권력 집중 비판도 강했다. 하지만 이싼 사람들 중 많은 이들에게는 그런 비판보다 더 먼저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바로 “적어도 우리 삶을 바꾸려 했고, 적어도 우리를 상대해 준 사람”이라는 기억이다. 그 뒤에 군부와 기성 엘리트가 개입하는 모습을 보면서, 탁신은 더더욱 “우리 편”의 상징으로 굳어졌다. 

그래서 이싼은 레드셔츠의 본거지가 되었다

레드셔츠는 흔히 친탁신 지지층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조금 더 넓은 성격을 가진 운동이었다. 공식 명칭은 UDD였고, 핵심 정서는 “선거로 드러난 민심을 왜 비선출 권력이 뒤엎느냐”는 분노에 가까웠다. 브리태니커는 레드셔츠가 주로 북부와 북동부 농촌 기반이었고, 여기에 도시의 민주화 지지 세력도 가세했다고 설명한다. 

이싼이 레드셔츠의 중심지가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싼 사람들에게 레드셔츠는 단순한 색깔 정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역 차별에 대한 분노, 무시당해 온 기억, 우리 표를 인정하라는 요구를 담아내는 정치적 언어였다. 그래서 이싼의 친탁신 정서는 단순한 개인 숭배가 아니라, 지역의 경험과 정치구조가 결합한 결과라고 봐야 한다. 

그렇다고 탁신이 이싼을 완전히 바꾼 것은 아니다

이 대목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

탁신에 대한 좋은 기억이 있다고 해서, 그가 이싼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싼의 어려움은 원래 훨씬 더 깊은 문제와 연결돼 있다. 농업 의존도, 낮은 생산성, 교육과 산업 기회의 부족, 수도권 중심 발전 구조 같은 문제는 한두 개의 인기 정책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아시아재단의 이싼 보고서도 정부 프로그램에 대한 높은 지지와 별개로, 지역의 장기적 생활수준 개선을 위해 더 좋은 교육과 지속가능한 산업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즉 탁신은 이싼의 삶을 덜 힘들게 만들었을 수는 있어도, 이싼의 구조적 불균형 자체를 완전히 뒤집지는 못했다. 이 점을 놓치면 탁신을 과대평가하게 된다.

하지만 반대로 “별로 바꾼 것이 없다”는 식의 평가도 현실과는 다르다. 의료제도가 실제로 의료비 위험을 줄였고, 정치적으로도 이싼 사람들에게 국가가 나를 본다는 감각을 남겼다는 점은 여러 자료에서 뒷받침된다. 그래서 가장 정확한 평가는 아마 이것일 것이다.

탁신은 이싼을 구원한 인물은 아니지만, 처음으로 이싼 서민들이 혜택과 존중을 동시에 체감하게 만든 정치인이었다. 

결국 이싼의 탁신 지지는 ‘대표성’의 문제였다

이싼이 탁신을 지지한 이유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결국 대표성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탁신은 이싼 사람들에게 돈만 준 것이 아니라,

국가가 나를 무시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주었고,

정치가 내 삶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경험을 주었고,

내 표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감각을 남겼다.

그래서 이싼의 탁신 지지는 단순한 포퓰리즘 소비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주변부로 취급받아 온 사람들이, 처음으로 자신들을 중심에 놓아준 정치세력에게 보낸 강한 응답이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쿠데타와 정치적 충돌을 거치면서 오히려 더 강해졌다. 

오늘날 이싼의 정치도 예전처럼 오직 탁신 개인만을 중심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세대가 바뀌고, 개혁정당이 등장하고, 반군부 정서 역시 더 다양한 정치적 형태로 분화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싼과 탁신의 관계를 이해하는 일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것은 단지 한 정치인의 인기 비결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태국에서 누가 국민으로 대접받았고, 누가 오랫동안 주변부에 머물렀는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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